도쿠가와 시게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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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시게요시는 에도 막부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차남으로,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였다. 1745년에 태어나 1795년에 사망했으며, 곤다이나곤을 지냈다. 이복 형인 도쿠가와 이에하루 사후 쇼군 계승 문제에서 밀려났으며, 가신의 재정 비리 문제도 겪었다. 후사가 없어 사망 후 영지는 몰수되었지만, 이후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인 도쿠가와 아츠노스케가 시미즈 가문을 재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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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시게요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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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도쿠가와 쇼군 가문,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 |
이름 | 도쿠가와 시게요시 |
다른 이름 | 시미즈 시게요시 |
개명 | 만지로, 시게요시 |
칭호 | (없음) |
계명 | 준토쿠인 타이쿠유신 대거사 |
묘소 | 도에이잔 료운인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엔쿄 2년 2월 15일 (1745년3월 17일) |
사망 | 간세이 7년 7월 8일 (1795년8월 22일) |
관직 | |
관위 | 종3위좌근위권중장 겸 궁내경, 참의, 권중납언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이에하루 |
번 | (없음)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시게, 어머니: 안쇼인 |
형제 | 이에하루, 시게요시 |
배우자 | 사다코 여왕 (후시미노미야 사다타케 친왕 딸) |
자녀 | 없음 |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 | |
역대 당주 | 전임: (도쿠가와 이에시게) 후임: 당주 공석(도쿠가와 아쓰노스케) |
당주 대수 | 1대 |
당주 임기 | 1758년 ~ 1795년 |
2. 생애
엔쿄 2년(1745년)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차남으로 태어나, 호레키 9년(1759년)에 원복하고 도쿠가와를 칭하며 종3위 사콘에곤노츄조 겸 궁내경이 되었다. 호레키 12년(1762년)에는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고, 이듬해 후시미노미야 사다사다 친왕의 딸 사다코와 결혼했다. 덴메이 원년(1781년) 참의가 되었다.
이복형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쇼군이 된 후, 한동안 형제 사이는 좋았으나 이에하루 치세 후반에는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대우 상승과 함께 지위가 역전되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쇼군직을 계승하면서 시게요시는 쇼군이 되지 못했다.
간세이 4년(1792년) 곤다이나곤이 되었고, 간세이 7년(1795년) 7월 8일, 51세로 사망했다.[1] 후사가 없어 영지는 몰수되었고, 부인 사다코에게는 연금이 지급되었다. 시게요시의 죽음으로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엔쿄 2년(1745년) 2월 15일, 에도 막부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차남으로 에도성 니시노마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마쓰다이라 만지로였다. 같은 해 9월, 혼마루로 옮겼다.호레키 3년(1753년) 12월, 봉급 3만 표를 받았다. 호레키 7년(1757년) 5월, 후견인으로 무라카미 요시카타(비젠노카미)와 나가이 다케우지(주젠노쇼)가 붙었다. 호레키 8년(1758년) 12월, 시미즈 저택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
호레키 9년(1759년) 12월 27일, 15세 때 원복하고, 이에시게의 휘를 받아 시게요시로 이름을 고쳤다. 또한 도쿠가와를 칭했다. 같은 날, 종3위 사콘에곤노츄조가 되어 궁내경을 겸했다. 같은 달, 시미즈 문 안의 저택으로 이사했다.[1]
2. 2. 시미즈 가문 상속
호레키 3년(1753년) 12월, 봉급 3만 표를 받았다. 같은 해 7년(1757년) 5월, 후견인으로 무라카미 요시카타(비젠노카미)와 나가이 다케우지(주젠노쇼)가 붙었다. 같은 해 8년(1758년) 12월, 시미즈 저택으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다.호레키 9년(1759년) 12월 27일, 15세 때 원복하고, 이에시게의 휘를 받아 시게요시로 이름을 고쳤다. 또한 도쿠가와를 칭했다. 같은 날, 종3위 사콘에곤노츄조가 되어 궁내경을 겸했다. 같은 달, 시미즈 문 안의 저택으로 이사했다.
호레키 12년(1762년) 5월 15일, 영지 10만 석을 무사시국, 가즈사국, 시모사국, 가이국, 야마토국, 하리마국, 이즈미국 중에서 받았다. 이때, 후견인은 가로로 개칭되었다.
호레키 13년(1763년) 겨울, 후시미노미야 사다사다(사다타테) 친왕의 딸 사다코와 결혼했다.
덴메이 원년(1781년) 12월 5일, 참의가 되었다.
쇼군이 된 이복 형 도쿠가와 이에하루는 호레키 10년(1760년)부터 메이와 7년(1770년)까지 시미즈 저택을 11번, 이에하루 정실인 이소노미야도 2번 방문하여 형제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하루 치세의 후반에는 히토바시 하루사다의 대우 상승과 함께 지위가 역전되었다. 안에이 8년(1779년)에 쇼군 세자 이에모토가 사망하자, 하루사다의 장남 도요치요(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덴메이 원년(1781년)에 이에하루의 양자가 되었다. 그리고 덴메이 6년(1786년)에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이에하루의 최근친(이에하루의 동생)인 시게요시를 제쳐두고, 이에나리(이에하루의 종질)가 쇼군에 취임했다.[1]
덴메이 8년(1788년) 5월, 오니와반・다카하시 츠네나리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에 관해 "통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서를 적었다. 구체적으로는 가신 나가오 고헤이가 시미즈 가문의 재정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요시노 책자』에서는, 나가오는 3만 냥을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금하고, 시게요시를 쇼군 자리에 앉히려고 획책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간세이 4년(1792년) 윤달 2월 13일, 곤다이나곤이 되어 시미즈라고 칭했다.
2. 3. 혼인
호레키 13년(1763년) 겨울, 후시미노미야 사다사다(사다타테) 친왕의 딸 사다코와 혼인했다.[1]2. 4. 참의 취임
덴메이 원년(1781년) 12월 5일, 참의가 되었다.[1]이복 형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쇼군이 된 후, 호레키 10년(1760년)부터 메이와 7년(1770년)까지 시미즈 저택을 11번 방문했고, 이에하루의 정실인 이소노미야도 2번 방문하여 형제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하루 치세 후반에는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의 대우 상승과 함께 지위가 역전되었다. 안에이 8년(1779년)에 쇼군 세자 이에모토가 사망하자, 하루사다의 장남 도요치요(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덴메이 원년(1781년)에 이에하루의 양자가 되었다. 덴메이 6년(1786년)에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이에하루의 최근친(이에하루의 동생)인 시게요시를 제쳐두고 이에나리(이에하루의 종질)가 쇼군에 취임했다.[1]
2. 5. 쇼군 계승 문제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쇼군이었던 시절, 후반에는 히토바시 하루사다의 대우가 상승하면서 시게요시의 지위가 역전되었다. 안에이 8년(1779년)에 쇼군 세자 이에모토가 사망하자, 하루사다의 장남 도요치요(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덴메이 원년(1781년)에 이에하루의 양자가 되었다. 덴메이 6년(1786년), 이복형인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이에하루의 최근친(이에하루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시게요시는 쇼군이 되지 못하고 이에나리(이에하루의 종질)가 쇼군에 취임했다.[1]덴메이 8년(1788년) 5월, 오니와반 다카하시 츠네나리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에 관해 "통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가신 나가오 고헤이가 시미즈 가문의 재정을 사유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요시노 책자』에서는, 나가오가 3만 냥을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금하고, 시게요시를 쇼군 자리에 앉히려고 획책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2. 6. 가신 문제와 사망
덴메이 8년(1788년) 5월, 오니와반 다카하시 츠네나리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 "통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는 가신 나가오 고헤이가 시미즈 가문의 재정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요시노 책자』에서는 나가오가 3만 냥을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금하고, 시게요시를 쇼군 자리에 앉히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1]간세이 7년(1795년) 7월 8일, 시게요시는 51세로 사망했다.[1] 법명은 슌토쿠인 타이쿠 유신 다이코지이며, 묘소는 도에이잔 료운인이다.[1]
시게요시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영지는 몰수되었다.[1] 부인 사다코(테이쇼인)에게는 막부로부터 연금 3000냥과 쌀 500섬이 지급되었다.[1] 시미즈 가문의 가로는 시미즈 근무 담당으로 개칭되었다.[1] 시게요시의 죽음으로 이에시게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3. 시게요시 사후의 시미즈 가문
시게요시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영지와 저택은 일시적으로 막부에 수납되었다. 수납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의향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 당주 하루사다는 로주 마쓰다이라 노부아키 등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하루사다는 일곱째 아들 카메노스케(후의 마쓰다이라 요리이)에 의한 상속을 생각했던 듯하다. 그 후의 시미즈 가문은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다섯째 아들 아츠노스케를 당주로 세워 간세이 10년 (1798년)에 재흥되었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시게
- 어머니: 안쇼인 (1721년 ~ 1789년)
- 부인: 데쇼인
5. 관련 작품
도쿠가와 시게요시가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음과 같다.
- 젊은 사무라이 포물장 (1991년, TV 아사히, 배우: 오바 준)
- 8대 쇼군 요시무네 (1995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오노세 테루)
- 별의별 - 츠타야 주조 영화의 꿈 이야기 (2025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오치아이 모토키)
5. 1. 텔레비전 드라마
- 1991년: 젊은 사무라이 포물장 (TV 아사히, 배우: 오바 준)
- 1995년: 8대 쇼군 요시무네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오노세 테루)
- 2025년: 별의별 - 츠타야 주조 영화의 꿈 이야기 (NHK 대하 드라마, 배우: 오치아이 모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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